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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에 나부끼는 일본 해적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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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수출지원 해외 서포터즈 / 배동선(인도네시아)
8월 17일 독립기념일을 앞두고 인도네시아 전국의 도로와 주택가에는 예년처럼 국기인 홍백기가 펄럭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올해는 이와 달리, 인기 일본 만화 ‘원피스(One Piece)’의 해적기가 국기 대신 혹은 국기와 함께 여러 장소와 행사에서 게양되는 이색적인 풍경이 목격되고 있다.
이는 단순한 팬심이나 캐릭터 소비가 아니다. 검은 바탕에 밀짚모자를 쓴 해골이 그려진 원피스 속 ‘졸리 로저스’ 해적기는 현재 인도네시아에 만연한 정치·사회적 문제에 대한 국민적 불만을 상징하며, 소셜미디어 이용자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 밑바탕에는 ‘우리는 해적 국가에 살고 있다’는 자조 섞인 자괴감이 깔려 있다. 지난 7월 31일(목), 한 X 플랫폼 이용자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권력자들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지금, 우리의 국기 홍백기는 너무 신성해 감히 게양할 수 없다”라는 글을 남겼다. 그는 이어 “작금의 국가 상황을 본다면 홍백기보다 해적기를 게양하는 것이 국가 정체성에 더 어울린다”며, 원피스 깃발이 이 나라에 만연한 불의에 맞서는 저항의 상징이라고 덧붙였다.
자카르타에 휘날리는 원피스 해적기와 인도네시아 국기 (출처: x.com/ @reododdyleonard)
이런 상황이 벌어진 배경은 복합적이지만,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프리미엄 쌀 사건이었다. 저품질 비축미를 섞어 품질이 크게 떨어진 쌀에 ‘프리미엄’ 상표를 붙이고 제값을 다 받아 판매한 것이다. 가족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좋은 쌀을 먹이려 했던 수많은 서민과 중산층이 피해를 입었는데, 이러한 품질 조작에 정부 기관들의 개입 정황이 드러나면서 국민적 분노가 커졌다. 내각의 농업부는 물론 식량조달청 역할을 하는 불로그(Bulog)까지 책임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국민의 세금으로 급여를 받는 국가의 공복들이 오히려 주권자인 국민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입힌 것이다.
그 결과 일부 국민들은 국가가 자신들에게 ‘해적질’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8월 17일 독립기념일에 국기인 홍백기 대신 해적기를 게양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여겼다. 이러한 생각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빠르게 확산되었고, 실제 거리와 주택가에서 원피스 해적기가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은 ‘인도네시아는 해적국가’라는 명제가 국민들 사이에서 일정한 설득력을 얻었기 때문이다.
정부 당국이나 산하 국영기업, 단체들이 저지르는 부정부패 사례는 끝이 없지만, 올해 초에도 국민들을 망연자실하게 한 사건이 있었다. 고급 휘발유로 통하는 퍼르타막(Pertamax)에 저가 휘발유 퍼르탈리트(Pertalite)을 섞어, 사실상 저가 휘발유와 다름없는 품질의 연료를 프리미엄 가격에 판매한 국영 석유공사 뻐르타미나의 비리가 드러난 것이다. 범인들이 검거되어 수사와 재판이 진행되고 있지만, 어떤 처벌이 내려지든 이미 피해를 입은 국민들에게는 보상이 주어지지 않았다. 기대하는 사람도 없었다.
이처럼 사건이 잇달아 터지자, 누군가가 시작한 ‘압제적인 정부에 맞서는 약자의 상징’으로서 원피스 해적기를 게양하자는 운동은 소셜미디어를 타고 인도네시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정부가 독립 80주년을 맞아 공모한 기념 로고를 각종 영상과 홍보물에 활용하고 있던 상황에서, 한 X 플랫폼 이용자가 원피스 해적기와 80주년 기념 로고를 합성한 이미지를 올려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X의 @odzanshinbe 계정에 올라온 독립 80주년 로고 합성 밈. 현재는 해당 포스팅이 지워졌다.
노란 밀짚모자를 쓴 해골과 교차된 뼈가 그려진 만화 원피스 속 졸리 로저스 해적기는 집과 차량 등 다양한 곳에 게양되었고, 일부 소셜미디어 이용자들은 아예 이 깃발을 자신의 프로필 사진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국민들이 이 깃발을 온·오프라인에서 게양하는 것은 정부에 대한 불만을 가장 소극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하고 평화적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만약 정부가 단속보다 소통과 해소의 기회로 삼았다면, ‘해적기 게양 현상’은 조기에 잦아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 당국은 처음엔 이를 무시하다가 곧이어 적극적인 단속 방침을 예고했다. 학교 무상급식, 빈민을 위한 무상 기숙학교, 전국 단위 협동조합 지원 등 각종 포퓰리즘 정책으로 출범 초기에 80%가 넘는 국정 지지도를 누렸던 프라보워 정부로서는, 이처럼 민심이 이반되는 현상이 뼈아프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국회는 해적기 게양을 인도네시아의 단결을 해치려는 ‘도발적 행위’로 규정하며 과민하게 반응했다. 수프미 다스코 아흐맛 국회부의장은 해적기 현상이 막 시작되던 7월 31일, 안보기관으로부터 ‘원피스 해적기 게양 운동’을 통해 국론을 분열시키려는 조직적 시도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주장하며 음모론을 퍼뜨렸다.
이튿날 부디 구나완 정치안보조정장관 역시 기자회견을 열고 독립기념일에 원피스 깃발을 게양하는 행위를 범죄로 간주하겠다며, 이를 강행하는 주민들에게 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위협했다. 심지어 가장 큰 포용력을 보여야 할 인권부의 나탈리우스 삐가이 장관조차 해적기 게양을 ‘반역의 한 형태’라며 비난에 가세했다. 정부는 해적기를 원래 국기인 홍백기에 대한 모독으로 규정하고, 이를 마치 반군기의 일종처럼 취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민사회는 정부의 이런 단속 기조를 강하게 비판하며, 사회적 현상을 범죄로 규정해 탄압해서는 안 된다고 맞서고 있다. 깃발을 게양한 시민들, 트럭 기사, 운전자들은 현실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 일종의 표현의 자유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인권단체인 인도네시아 법률구조재단(YLBHI)의 무하마드 이스누르는, 국민들이 홍백기를 해적기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홍백기 아래에 원피스 깃발을 함께 게양한다면 이는 국가와 국기에 대한 존중을 전제로 하고 있으므로 반역 행위가 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이는 오히려 조국에 대한 애정과 민주주의 참여의 표현이며, 시민의식을 칭찬받아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애니메이션에서 비롯된 이 깃발을 게양하는 것이 애정을 담아 정부기관이나 지자체, 대중조직, 축구클럽의 깃발을 흔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기브란 라카부밍 라카 부통령은 지난해 대선 토론 당시 옷깃에 원피스 해적기 모양의 핀을 달고 나왔지만, 그때는 누구도 문제 삼지 않았다.
하지만 8월 초부터는 전국적으로 해적기에 대한 본격적인 단속이 시작되었다. 8월 4일(월) 동부자바 뚜반에서는 군경이 여러 지역에서 해적기를 압수하고, 한 남성에게서는 휴대전화 속 두 아이가 해적기에 경례하는 사진을 강제로 삭제하도록 했다. 같은 날 중부자바 스라겐에서도 경찰과 군인들이 도로 바닥에 그려진 원피스 해적기 그림을 주민들에게 지우도록 명령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밀짚모자 모양의 졸리 로저스 깃발 주문이 의류 공장에 몰려들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애초에 잠시 반짝하다 끝날 것이라 여겨졌던 해적기 게양 현상은 8월 둘째 주 들어 오히려 더 확산되며 파장이 커졌다. 전국 곳곳에서 주민들과 당국 간 충돌이 이어졌고, 심지어 술라웨시에서는 트럭에 해적기를 달고 가던 채소상이 사복 군인에게 불려 나가 욕설을 듣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탄중삐낭에서는 리아우제도 지방경찰청과 시경이 독립기념일을 앞두고 원피스 깃발을 게양한 주민 두 명을 단속해 질책하며 재발 방지 서약서에 강제로 서명하게 했다. 경찰은 원피스 깃발 게양이 헌법 위반이며 치안과 질서를 해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구체적으로 헌법의 어느 조항을 위반했는지는 제시하지 못했다.
이처럼 해적기를 둘러싼 논란이 열흘 넘게 이어지자, 8월 9일(토) 마침내 대통령 입장이 나왔다. 쁘라스티요 하디 국무장관이 대통령궁 기자회견에서 “원피스 해적기를 게양하는 것은 국민들의 창의적 표현일 뿐 문제 삼지 않겠다”는 대통령의 의중을 공개한 것이다. 또한 이 문제로 군경이 단속에 나서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다만 ‘국기인 홍백기와 충돌하거나 이를 비교·논쟁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한’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왼쪽 위에 독립 80주년 로고가 있다. (출처: 국무부 공식 유튜브 채널 캡쳐)
만약 고의로 홍백기를 게양하지 않고 원피스 깃발만을 올리도록 대중을 도발하는 세력이 있다면, 그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경고도 덧붙였다. 즉, 독립기념일에 홍백기 대신 원피스 깃발만이 펄럭이는 상황은 ‘계획적 도발’로 간주하겠다는 의미다.
쁘라스티요 국무장관은 해적기 사용 그 자체보다, 인도네시아 독립기념일이라는 ‘시점’을 오용하는 것이 더 문제라고 지적했다. 독립을 위해 싸운 영웅들을 기리는 기념일의 신성함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입장이 발표된 이후에도 단속이 완전히 멈추지는 않았다. 북부 수마트라 탄중삐낭과 인접한 리아우제도의 바탐섬 스쿠빵(Sekupang)에서는 경찰이 한 주택 단지 내의 원피스 깃발을 압수했다. 스쿠빵 경찰서장 히빨 뚜아 시라잇 총경은 8월 5일(화) 경찰과 통반장 사무소(RW/RT) 관계자, 단지 내 경비원들이 공공질서 유지와 국가 상징 존중 차원에서 깃발을 내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형사입건은 하지 않았지만 해당 주민에게 ‘현명히 처신하라’는 경고를 남겼다.
이에 대해 바탐 시의회 의원 유디 꾸르나인은 경찰 조치에 의문을 제기하며, 해적기를 내리도록 할 법적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위법 사실이 없는 상황에서 깃발을 강제로 철거한 것은 표현의 자유를 제한한 것이라 지적했다. 바탐시와 리아우제도 지방의회에서 20년간 활동한 그는, 명확한 법적 근거 없이 경찰이 강제 조치를 취한 것은 당혹스러운 일이며, “수하르토 신질서 시대보다 더 폭압적인 행동”이라고까지 비판했다.
비록 직접 발언이 아니라 국무장관을 통한 발표였지만, 대통령이 ‘해적기 게양을 단속하지 않겠다’고 밝힌 이후에도 일부 지역에서 단속이 이어진 것은, 실제로는 대통령의 의중이 단속 쪽에 더 기울어 있을 것이라는 계산 때문으로 보인다. 설령 겉으로는 문책을 당하더라도, 실질적으로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그럼에도 대통령이 해적기 단속을 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것은, 대중의 분노와 저항이 고조될 경우 프라보워 대통령이라도 일정 부분 이에 부응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신호라 할 수 있다.
이는 최근 부패 사건으로 유죄 선고를 받은 톰 렘봉 전 무역부 장관과 하스토 끄리스티얀토 전 투쟁민주당 사무총장을 사면한 사례와도 닮아 있다. 대통령은 기소·구속·재판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무리하게 밀어붙였으나, 야권과 국민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1심 선고 직후 곧바로 사면을 단행했다. 억지로 밀어붙인 것에 대한 사과 대신 ‘통 큰 결단’으로 포장된 점은 아쉬웠지만, 국민 불만이 임계점을 넘지 않도록 위태로운 순간에 절충적 조치를 취하며 한 발 양보할 줄 아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이는 곧, 정권 초기에 여러 정책을 다소 무리하게 추진하고 있는 대통령이 최소한 국민에 대한 두려움과 존중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따라서 프라보워 정권이 앞으로 마냥 일방적이고 강경하게만 나아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 위 원고는 현지 외부 전문가가 작성한 원고로, (사)경북PRIDE기업 CEO협회의 공식 의견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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