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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 경제의 고질적 병폐 인플레, 드디어 잡혀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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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수출지원 해외 서포터즈 / 손영식(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에서 매월 새 가격표를 받는 건 오래된 관행이다. 생산업자나 도매업자는 달이 바뀔 때마다 가격표를 만들어 소매업자에게 뿌린다. 물론 가격이 내리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번 달부터는 이만큼 가격이 오르니 소매가격도 알아서 올리라는 일방적인 통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격 인상이 월초로 제한돼 있는 것도 아니다. 페소-달러 환율이 급등하거나 경제팀이 바뀌는 등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발생하면 가격표의 효력이 정지되기 일쑤다. ○월○일 ○시부터 가격표가 유효하지 않으니 참고하라는 생산업자나 도매업자의 문자가 바로 날아든다. 이런 문자를 받기 전까지 가격이 또 얼마나 오를지 가늠하기 힘든 소매업자는 혹시라도 손해를 볼까봐 해당 상품의 판매를 중단한다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새 가격표가 오지 않았다는 게 화제가 된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현지 언론은 “8월 초에 (인상된) 새 가격표를 받지 못했다는 소매업체가 많았다”고 최근 보도했다. 특히 식품업계에서 이런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는 7월에 나눠준 가격표를 그대로 사용하라는 의미로 가격동결을 의미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가격이 오르는 게 일상으로 굳어 어느덧 “오늘이 제일 싸”라는 말이 진리가 되어버린 아르헨티나에선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실제로 2022년 7월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상인이 점포 앞에 세워둔 안내문이 화제가 된 적도 있다. 분필로 쓴 안내문엔 “오늘 사세요, 오늘이 내일보다 쌉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쓴웃음을 자아내면서도 현실을 날카롭게 꼬집은 안내문을 내건 이 상인은 카피라이터로 직업을 바꾸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정육점이 설치한 안내문. “오늘 사세요. 내일보다 쌉니다”라고 적혀 있다.

(출처: 로이터)

 

 

정부 “인플레이션 잡았다” 자신만만

 

최근 아르헨티나 정부는 통계청(INDEC)의 발표에 환호했다. 통계청은 7월 소비자물가가 지난해 동월 대비 263.4%, 전월에 비하면 4% 오른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7월에도 소비자물가지수는 연간으로 보면 아찔하게 현기증 나는 세 자릿수 고공비행을 했지만 정부는 후자, 즉 월간 지수에 주목했다. 월간 소비자물가상승률은 2022년 1월 3.88% 이후 30개월 만의 최저였다. 하비에르 밀레이 정부가 출범한 지난해 12월 25.5%와 비교하면 월간 소비자물가상승률은 확연히 낮아졌다. 

 

월간 기준으로 뚝 떨어진 물가지수에 고무된 탓일까. 정부에선 약간은 성급해 보이는 반응도 나왔다. 아르헨티나 정부대변인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다 했다”며 “기술적으로 보면 인플레이션은 이제 끝난 문제”라고 말했다. 인플레이션을 잡았다고 공언한 셈이다. 그는 “이제 남은 일은 인플레이션이 무너져 내리는 걸 지켜보는 것뿐”이라는 말도 했다. 

 

정부가 아르헨티나의 고질병인 인플레이션 잡기와 물가안정에 자신을 보인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7월 아르헨티나 대형마트 최고경영자들과 만난 루이스 카푸토 경제장관은 “올해가 가기 전 적어도 식음료 부문 인플레이션은 0(제로)이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고 한다. 장을 볼 때마다 오른 가격을 보는 데 익숙한 가정주부가 들었으면 코웃음을 쳤을지도 모르지만 일각에선 카푸토 경제장관의 호언장담은 현실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기대감이 모락모락 피어난다. 시장조사기관 LCG는 최근 보고서에서 “매주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시장가격조사에서 8월 둘째 주 식음료 소비자가격이 0.1% 내린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이 기관의 직전 4주 동안 조사에서 식음료가격은 2% 오른 것으로 집계됐었다. 

 

 

신중론 제기되는 이유

 

물론 신중론도 있다. 물가상승세가 꺾이고 있지만 마치 정책으로 인플레이션을 완전히 잡은 것처럼 정부가 성급하게 샴페인을 터뜨려선 곤란하다는 것이다. 긴축의 고삐를 놓지 않고 있는 하비에르 밀레이 정부는 만성적 재정적자를 흑자로 반전시키는 데 성공했고 중앙은행도 발권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인플레이션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제거한 셈이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이 꺾인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는 지적이 많다. 바로 경기침체다. 아르헨티나 경제는 지금 침체의 터널을 지나고 있다. 경기가 가라앉으면서 민간소비도 푹 꺼져 소매업자 입장에선 직성(?)대로 가격을 올리는 게 쉽지 않다. 경기가 회복기에 접어들고 민간소비가 되살아나면 언제든지 인플레이션에 다시 불이 붙을 수 있다는 것이다. 

 

 

 

중앙은행의 발권을 밀레이 대통령이 감시하고 있다는 의미로 한 기업이 중앙은행 앞에 설치한 밀레이 대통령의 밀랍인형.

(출처: 테에네)

 

 

섣부른 낙관을 경계하게 하는 복병도 많다. 7월 근원인플레이션은 3.8%를 기록해 전월 대비 0.1%포인트 상승했다. 경제연구기관 에코고는 “근원인플레이션이 내리지 않고 있는 건 걱정스러운 지점”이라며 “근원인플레이션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인플레이션 하락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물가에 끼치는 영향이 지대한 페소-달러 환율도 예의주시해야 할 변수다. 경기침체로 저축했던 달러를 내다파는 중산층이 늘면서 최근 페소-달러 환율은 내림세를 타고 있지만 아르헨티나에서 환율동향은 예측을 불허한다. 환율이 오르면 물가가 동반상승하는 건 수 십년 동안 국민이 경험해 온 절대불변의 공식이다.

 

 

달라진 인플레이션 대책

 

신중론이 지배적이지만 정부는 낙관적 목표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올해 소비자물가상승률을 월 2%까지 떨어뜨릴 수 있다며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정부가 목표를 달성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밀레이 정부 출범 후 아르헨티나의 물가대책이 달라진 건 분명하다. 

 

지난해 정권을 내준 페론당은 기업을 압박하는 식으로 물가를 잡으려다 실패를 반복하곤 했다. 정부가 원하는 수준으로 가격을 맞추지 않거나 가격동결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으면 수입허가를 내줄 수 없다고 기업을 겁박하는 식이었다. 이에 반해 밀레이 정부는 자유시장경제 원칙으로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지난 4월 아르헨티나 정부는 브라질 식빵을 수입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다음 달부터 주요 대형 마트에서는 브라질 식빵이 판매되기 시작했다. 중량 400g짜리 브라질 식빵의 당시 판매가격은 3,300페소(한화 약 4,600원), 동일한 중량의 아르헨티나 식빵의 가격은 브랜드에 따라 최저 4,300페소(한화 약 6,400원), 최고 5,500페소(한화 약 7,600원)였다. 세계적 농업대국인 아르헨티나에선 밀이 대량 생산된다. 제빵에 사용되는 밀가루도 넉넉하게 공급된다. 일부는 브라질로 수출된다. 이런 아르헨티나가 브라질로부터 식빵을 수입하기로 한 건 가격을 잡기 위해서였다. 

 

 

 

대형 마트에 브라질에서 수입한 식빵이 진열돼 있다.

(출처: 암비토피난시에로)

 

 

식빵은 시작에 불과했다. 연이어 아르헨티나는 에콰도르 생선통조림을 수입해 시장에 풀었다. 중량 170g 상품을 기준으로 국산통조림은 3,699페소(한화 약 5,100원), 에콰도르 통조림은 985페소(한화 약 1,300원)로 국산과 수입품의 가격 차이는 현저했다. 

 

이후 아르헨티나는 꾸준히 식품 수입을 늘리고 있다. 파라과이와 우루과이 등 인접국으로부터 과자와 버터, 마테(남미의 전통 차), 우유크림 등을 수입하고 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식품을 수입해 국산보다 저렴하게 판매하는 기업에 120일간 부가세와 소득세를 부분적으로 감면해주겠다고 화끈한 인센티브까지 약속했다. 경제부 고위 관계자는 “시장경제에서 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따라 결정되는 게 정상이지만 그간 아르헨티나에선 생산자가 횡포적으로 가격을 올리는 경우가 많았다”며 “이를 바로잡기 위해 정공법으로 인플레이션에 대응하기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아직은 조심스러운 인플레이션 전망

 

물가불안이 일상화되었기 때문인지 아르헨티나의 인플레이션에 대한 전망에서 일치된 의견을 찾아보는 건 꽤나 어려운 일이다. 글로벌 금융기관의 전망도 기류가 다르긴 마찬가지다. JP모건은 3분기 아르헨티나 인플레이션이 4%대를 유지하다가 연말엔 다시 상승할 수 있다고 내다보고 있지만 HSBC는 인플레이션이 연말까지 쭉 하강곡선을 그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이 금융기관 및 경제연구기관을 상대로 매월 실시하는 정기조사를 보면 12월 소비자물가상승률 전망치 평균은 3.8%였다. 이에 대해 경제전문가 곤살로 세미야스는 “인플레이션 둔화 프로세스가 지속될 여지는 충분하다”면서도 “그럼에도 근원인플레이션 동향 등을 보면 월간 소비자물가상승률이 3% 아래로 내려가긴 힘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현지 언론은 “당장 8월 소비자물가상승률이 4% 아래로 떨어질 것인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며 “물가지수가 4%를 유지하거나 상승할 경우 정부가 인플레이션 목표치를 월 3%로 올려 잡는 게 보다 현실적일 것이라는 지적이 커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 위 원고는 현지 외부 전문가가 작성한 원고로, (사)경북PRIDE기업 CEO협회의 공식 의견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