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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 유통량 세계 2위 아르헨티나, 국민은 달러를 깔고 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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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수출지원 해외 서포터즈 / 손영식(아르헨티나)
증시가 400% 상승했다고?
지난해 12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증시의 메르발 지수는 사상 처음으로 100만을 넘어섰다. 메르발 지수는 지난해 400% 상승하며 투자자들에게 상당한 수익을 안겨주었다. 지난해 인플레이션율이 211.4%에 달하며 화폐의 실질 가치가 급격히 하락했음을 고려하더라도, 주식 투자 수익률은 약 200%에 육박한다.
만약 원금 손실에 대한 우려로 주식 투자가 부담스럽다면, 정기 예금도 고려할 만하다. 지난해 아르헨티나의 기준금리는 75%로 시작해 여섯 차례 인상되며 한때 133%까지 상승했다. 이에 따라 예금 금리도 함께 오르며 한때 152%를 초과했다. 비록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실질 금리는 마이너스였지만, 여유 자금이 넉넉하고 저축을 통해 자산을 불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정기 예금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이처럼 증시 지수와 예금 금리가 높은 수준이라면, 투자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주목할 법하다. 그러나 정작 아르헨티나 국민이 가장 민감하게 지켜보는 것은 다른 지수, 바로 페소-달러 환율이다. 특히 국민적인 관심사는 정부의 감시를 피해 페소화를 달러화로 바꾸거나 보유한 달러를 암시장에서 거래할 수 있는 암달러 환율이다. 아르헨티나에 거주하는 한인들 역시 예외는 아니다. 한인들이 참여하는 모바일 메신저 단체방(카카오톡 방)에서는 환율 정보가 활발히 공유되고 있다.
유력 일간지 라나시온의 경제면 화면. 각종 환율 정보가 최상단에 표시돼 있다. (출처: 라나시온 사이트 캡처)
아르헨티나 주요 언론도 거의 실시간으로 환율 정보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아르헨티나의 유력 일간지인 라나시온의 경제 섹션에 들어가면 최상단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페소-달러 환율과 페소-유로 환율 정보다. 특히 페소-달러 환율은 공식 환율뿐만 아니라 암달러를 포함한 여러 종류로 세분화되어 표시된다. (나중에 글을 쓸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외환시장 질서가 붕괴되면서 아르헨티나에는 복수의 페소-달러 환율이 존재하게 되었다.) 아르헨티나 국민이 얼마나 환율에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무조건 바꿔야 산다
화려하게 개막한 2024 파리 올림픽의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올림픽에서 메달을 획득하면 아르헨티나 정부는 포상금과 연금을 지급한다. 그러나 아르헨티나는 중남미에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에게 가장 적은 연금을 제공하는 국가로, 월 440달러를 지급한다. 아르헨티나가 원래부터 올림픽 연금에 인색했던 것은 아니다. 2016년에는 월 1,872달러, 2017년에는 월 1,924달러를 지급하며 불과 7~8년 전만 해도 아르헨티나는 우리나라보다 더 많은 올림픽 연금을 제공하는 나라였다. 하지만 2020년대 들어 페소-달러 환율이 급등하면서 올림픽 연금이 월 400달러대로 크게 줄어들었다. 물론 앞으로 페소-달러 환율 변동에 따라 올림픽 연금이 다시 2,000달러에 육박하는 시대가 올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면서, 아르헨티나에서는 돈이 생기면 무조건 달러로 바꿔 보관하는 것이 일종의 불문율이 되었다. 달러에 대한 국민의 절대적인 신뢰는 경험에서 비롯된 삶의 지혜이자 교훈인 셈이다.
아르헨티나에는 매트리스달러가 있다
일본에 세칭 ‘단스예금’(금융회사에 맡기지 않고 집안에 보관하는 예금)이 있다면 아르헨티나에는 ‘매트리스달러’가 있다. 말 그대로 매트리스 밑에 깔아둔 달러지폐를 일컫는 표현이다. 과거 이런 식으로 달러 현금을 보관하는 가정이 많아 생긴 표현이라고 하는데 물론 지금은 대여금고 이용 등으로 보관 방식이 많이 바뀌고 다양해졌다. 그래서 요즘 매트리스달러는 아르헨티나 금융권을 이탈한 달러 자산을 통틀어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곤 한다.
한 경제전문지가 매트리스달러에 대한 기사와 함께 사용한 사진. 연출했지만 국민적 달러 사랑을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출처: 암비토 피난시에로)
아르헨티나 통계청은 분기별로 매트리스달러에 대한 통계를 낸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아르헨티나 국민이 외국은행에 예치했거나 대여금고 또는 집안에 개인적으로 보관하고 있는 매트리스달러는 2,777억 9,300만 달러였다. 이는 전년 2,559억 2,400만 달러보다 8.5%(218억 69만 달러) 늘어난 것으로 외환보유고의 10배에 달하는 거액이다.
7월 기준으로 아르헨티나의 외환보유고는 273억 달러를 살짝 웃돌았다. 그나마 하비에르 밀레이 정부가 출범한 지난해 12월 이후 중앙은행이 힘겹게 금고를 채운 게 이 정도다. 중앙은행은 100억 달러대까지 줄었던 외환보유고를 필사적으로 늘려 170억 달러 이상 불리는 데 성공했지만 국민이 보유한 매트리스달러가 10배 이상이라는 통계를 보면 왠지 허탈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아르헨티나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달러 많은 국가
아르헨티나의 수석장관, 우리나라로 치면 국무총리 격인 인물이 최근 상원 보고에서 "아르헨티나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달러가 유통되고 있는 국가"라고 언급했다. 그의 발언에는 근거가 있다. 비록 조금 오래된 자료이지만,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가 2006년에 발표한 보고서가 이를 뒷받침한다. '해외에서 미국 통화의 사용과 유통 현황'이라는 제목의 이 보고서에 따르면, 2005년 말 기준으로 시중에 유통된 미화는 7,600억 달러였으며, 그중 60%, 즉 4,500억 달러가 미국이 아닌 외국에서 유통되고 있었다.
보고서는 가장 많은 달러가 유통되고 있는 국가로 러시아(800억 달러)를 꼽았고, 그다음으로 아르헨티나와 중국을 공동 2위로 지목했다. 당시 아르헨티나와 중국에서 유통된 달러의 양은 각각 500억 달러로 추정되었다. 당시 아르헨티나의 인구는 약 3,740만 명이었다. 이 추정치를 바탕으로 계산하면, 당시 아르헨티나 국민 1인당 약 1,300달러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달러 팔아서 경기침체 견디는 국민
현재 아르헨티나 경제는 오랜 침체의 터널을 지나고 있다. 연말이 되면 경기 침체가 바닥을 치고, 경제가 상승 국면으로 전환될 것이라는 전망이 있지만, 당장 반전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경제연구기관 오를란도 페레레스는 최근 보고서에서 6월 산업 생산이 11.3% 감소하여, 14개월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또한, 아르헨티나 기업 10곳 중 7곳이 상반기에 종업원을 해고하며 인력을 줄였다는 보도도 있었다.
경제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이 이를 견딜 수 있는 이유는 비축된 달러 예금, 즉 매트리스달러가 넉넉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는 통계로도 확인된다. 중앙은행의 최근 통계에 따르면, 지난 4월 공식 외환시장에서 달러를 판 개인은 20만 8,000명, 달러를 매입한 개인은 5만 1,000명이었다. 개인이 시장에 공급한 달러는 1,400만 달러, 개인이 매입한 달러는 900만 달러였다. 복수의 외환시장 관계자는 "달러를 팔고 있는 개인 중에는 월급쟁이가 가장 많다"며 "경기가 어려워지자 매트리스달러를 팔아 생활비로 사용하는 생계형 환전이 최근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암시장에서의 환전은 중앙은행 통계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에서 개인의 공식 환전은 매우 제한적이다. 중앙은행은 은행 등 공식 채널을 통한 개인의 달러 매입을 월 최대 200달러로 제한하고 있다. 달러를 파는 데는 제한이 없지만, 환전 기록이 남으면 자금 출처를 소명하라는 세무 당국의 통지가 언제든 날아올 수 있다. 그래서 달러를 살 때나 팔 때나 암달러 거래를 선호하는 국민이 압도적으로 많다. 현재 암시장에서의 페소-달러 환율은 1,400페소 후반대, 공식 환율은 900페소 후반대로 격차가 50%에 육박하지만, 암거래가 공식 환전보다 훨씬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경찰이 한 불법 환전소를 단속하고 있다. (출처: 엘디아리오아르)
환전규제 못 푸는 이유도 국민적 달러 사랑 때문
시장경제를 신봉하는 밀레이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에서 "대통령이 되면 페소-달러 환전 규제를 철폐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는 현재 월 200달러로 제한된 한도를 없애고, 누구나 제한 없이 공식 채널을 통해 달러를 구매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의미였다. 이러한 계획은 국제통화기금(IMF)의 지속적인 요구사항이기도 하다. IMF는 아르헨티나 정부의 환전 규제가 증권거래를 이용한 우회 환전 등 편법 환전을 유발해, 외환시장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왔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지난해 아르헨티나에는 무려 12종류의 페소-달러 환율이 존재했다.
올해 상반기에는 밀레이 정부가 늦어도 6~7월에는 환전 규제를 철폐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기도 했지만, 결국 이러한 예상은 빗나갔다. 정부는 "환전 규제를 철폐하는 시점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것"이라며, 구체적인 철폐 일정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하고 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기술적으로 (규제 철폐에 대한) 준비가 부족하기보다는, 정부가 우려하는 것은 달러 사재기 열풍이 불어닥치는 것"이라고 최근 보도했다. 만약 규제를 철폐한 후 달러 사재기가 발생하면, 정부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는 걱정에 환전 규제를 해제하는 데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경제 전문가는 "만성적인 인플레이션으로 페소화 가치 하락에 익숙해진 아르헨티나 국민의 달러 사랑은 종교에 가깝다"며 "정부가 조심스러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 위 원고는 현지 외부 전문가가 작성한 원고로, (사)경북PRIDE기업 CEO협회의 공식 의견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