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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강력 긴축이 부른 심각한 경기침체의 끝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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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수출지원 해외 서포터즈 / 손영식(아르헨티나)
돈처럼 사용하는 채권
아르헨티나 북서부의 주(州) 라리오하. 비교적 짧은 구간이지만 칠레와 국경을 맞대고 있기도 한 라리오하는 7월부터 사실상 2개의 화폐를 쓰는 곳이 됐다. 주정주가 ‘차초’라고 명명한 채권을 발행해 뿌리기 시작한 것이다. 공무원 월급의 70%는 법정화폐인 페소화로, 나머지 30%는 채권 차초로 지급할 것이라고 라리오하 주정부는 밝혔다. 채권은 세금(주가 징수하는 지방세)을 내는 데도 사용할 수 있다. 가게에서 물건을 살 때 법정화폐처럼 통용되는 건 물론이다.
엄격하게 말하면 차초는 분명 채권이지만 차초를 채권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 언론도 발행소식을 전하면서 채권 대신 준화폐라는 표현을 썼다. 일상에서 경제생활을 할 때 페소화처럼 사용할 수 있는 지불수단임을 강조한 것이다. 실제로 차초는 지폐와 흡사한 모습을 갖고 있다. 우선 크기가 지폐와 엇비슷하다. 또 왼쪽 상단에는 액면가가 큰 글씨로 인쇄돼 있고 오른쪽 상단에는 일렬번호까지 찍혀 있다. 사정을 모르는 외국인이 본다면 영락없이 법정화폐라고 믿기 십상이다.
라리오하가 발행한 준화폐 채권 차초. 페소화 지폐와 규격이 비슷하다. (출처: 로스안데스)
페소화에 대한 차초의 교환비율은 1대1이다. 1,000차초는 1,000페소의 가치를 갖는다. 물건을 구입하고 가격이 3,000페소라면 1,000이라고 적혀 있는 채권 3장을 내주면 된다. 액면가(?)를 보면 차초는 1000, 2000, 5000, 1만, 5만 등 5종으로 발행됐다. 올해 들어 통계상으론 꾸준히 낮아지는 추세지만 여전히 인플레이션이 심한데 고액권이 제구실을 못해 불편을 겪는 주민들은 어쩌면 거래를 할 때 페소화보다 차초를 더 선호할지도 모르겠다. 지금 페소화의 최고액권은 지난 5월 중앙은행이 시중에 풀기 시작한 1만 페소권이다. 명색이 최고액권이지만 미화로 환산하면 지금의 환율로 10.90달러(약 1만 5,000원)의 가치를 가진 것에 불과해 최고액권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이다.
준화폐 채권은 위기의 상징
사실 준화폐 채권은 위기의 상징이다. 외환위기 폭발과 함께 불과 일주일 새 대통령이 다섯 번이나 바뀌는 초유의 총체적 위기가 발생한 2001년 아르헨티나에선 전국적으로 이런 채권 12종이 통용되고 있었다. 필자의 지갑에도 늘 중앙은행이 발행한 법정화폐 페소화, 연방정부가 발행한 준화폐 채권 ‘레콥’,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정부가 발행한 또 다른 준화폐 채권 ‘파타곤’ 등 3종 화폐(?)가 뒤섞여 꽂혀 있곤 했다. 심각한 재정난에 직면한 연방정부와 주정부들이 경쟁적으로 준화폐 채권을 찍어내면서 벌어진 일이다. 당시 통화질서의 혼란을 기억하면 지금도 현기증이 난다.
이렇듯 준화폐 채권은 혼란과 무질서, 위기의 상징인데 라리오하는 왜 또 다시 준화폐 채권을 찍어낸 것일까. 신임 연방정부의 강력한 긴축으로 바짝 위축된 경기를 살리기 위해서라는 게 주 당국의 설명이다. 경기를 살리기 위해선 돈을 풀어야 하는데 재정이 여의치 않고 연방정부의 지원도 끊겨 고민 끝에 내놓은 아이디어가 준화폐 채권 발행이었다고 한다. 라리오하 주의회는 225억 페소(약 2,453만 달러) 규모로 준화폐 채권을 발행해도 좋다고 법까지 제정해 주정부를 거들었다.
악몽은 쉽게 잊히지 않는 것 같다. 라리오하가 차초를 발행하자 브라질, 칠레, 우루과이 등 인접국 주요 언론들은 일제히 “아르헨티나에서 20여 년 만에 위기의 상징이 돌아왔다”고 보도했다.
심각한 경기침체
지금의 아르헨티나 경제는 침체 국면이다. 통계청(INDEC)에 따르면 1분기 아르헨티나의 국내총생산(GDP)은 지난해 동기와 비교할 때 5.1% 감소했다. 4개 분기 연속 마이너스행진이다. 기술적으로 경제는 2개 분기 연속 감소하면 침체에 빠진 것으로 본다. 아르헨티나 경기침체의 심각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특히 국내총생산이 1.2% 줄어든 지난해 4분기와 비교하면 해가 바뀌면서 경제는 더욱 가파른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한 여성이 마트에서 가격을 확인하고 있다. (출처: 크로니카)
경기침체는 각종 민간통계로도 확인된다. 아르헨티나 자동차산업의 중심지 코르도바에 있는 르노와 닛산의 공장은 7일(현지시간)부터 일주일간 조업을 전면 중단했다. 8시간 3교대작업을 실시하다 이를 6시간으로 줄이더니 급기야 조업 중단이라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노조 관계자는 “회사가 조업을 중단하기로 한 건 판매 부진 때문”이라며 “조업이 중단된 기간 동안에는 급여의 75%만 받기로 했다”고 말했다. 아직도 인플레이션이 높아 경제적으론 곤란한 조건이었지만 경기침체가 워낙 심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고 그는 덧붙였다. 공식 통계를 보면 6월에 판매된 신차는 2만 9,878대로 전달 3만 4,797대보다 14% 줄었다. 한 공식대리점 딜러는 “정말 파격적으로 할인을 해주거나 고객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건의 할부가 아니면 자동차를 팔기 힘들다”고 토로했다.
상반기 편의점업계 매출은 지난해 동기 대비 40% 줄었다고 한다. 아르헨티나에는 일명 ‘달콤한 주간’이라 하여 가족, 친구, 연인들이 초콜릿 등을 나누는 문화가 있다. 올해는 7월 1~7일이 달콤한 주간이었다. 편의점업계는 특수를 기대했지만 실적은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고 한다. 편의점협회장은 “소비자들이 좀처럼 지갑을 열지 않았다. 기대가 컸던 업계로선 당혹스러울 정도”라고 말했다. 주유소협회에 따르면 1~5월 유류판매는 아르헨티나 전국에서 감소했다. 아과수폭포로 유명한 미시오네스 등 일부 지방에선 최고 29%까지 유류 판매가 감소한 것으로 조사됐다.
원인은 초강력 긴축
다양한 분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강력한 긴축이 심각한 경기침체를 초래했다는 게 중론이다. 대통령선거 때 전기톱 퍼포먼스 유세로 세계적인 유명세를 얻은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취임 일성으로 긴축을 예고했다. 방만한 재정운영이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의 원인이라며 초강력 긴축으로 지출을 확 줄여 인플레이션의 근본적 원인을 치유하겠다고 했다.
밀레이 대통령(당시 후보)이 지난해 대선에서 전기톱을 들고 유세를 하고 있다. (출처: 인포시엘로)
밀레이 대통령은 취임 후 바로 공약을 실천에 옮겼다. 그는 18개 정부부처를 9개로 줄이고 대대적인 공무원 해고에 나섰다. 1분기에만 공무원 1만 5,000여 명이 실업자가 됐다. 밀레이 대통령은 또 각종 보조금을 확 줄였다.
강력한 긴축으로 밀레이 정부는 재정을 적자에서 흑자로 돌려놨다. 1분기 아르헨티나는 국내총생산(GDP)의 0.2%에 달하는 재정흑자를 기록했다. 아르헨티나가 재정흑자를 낸 건 2008년 이후 16년 만에 처음이다. 만성적 재정적자의 늪에 빠져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적자를 줄이라는 압박을 받아온 아르헨티나로선 실로 꿈같은 일이다.
하지만 국민은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전기나 가스 등 공공요금 인상을 꼽을 수 있겠다. 보조금 삭감으로 지금 아르헨티나에선 공공요금이 무섭게 오르고 있다. 가스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사업장을 가진 필자의 지인은 “매달 기본요금만 2,000페소 정도 냈는데 지난달엔 기본요금이 2만 페소로 올랐더라”며 “어떻게 불과 한 달 만에 공공요금이 1,000% 오를 수 있느냐”고 어이없어 했다. 또 다른 지인은 “월 200달러가 채 안 됐던 전기요금을 매달 1,000달러씩 내게 생겼다”고 걱정했다. 세계적인 축구스타 리오넬 메시의 고향 로사리오 등 일부 지방에선 공공요금 납부를 위한 신용대출상품까지 등장했다고 하니 공공요금 인상폭탄의 여파는 짐작하고도 남을 만하다.
한 현지인은 “지하철을 탔는데 요금이 100페소에서 700페소로 올라 있더라”라며 “공공요금과 교통요금 등이 너무 빠르게 오르니 덜컥 겁이 나더라. 나도 모르게 지독한 구두쇠가 되어버렸다”고 말했다.
예고된 고통, 내년엔 반전
긴축의 고통과 이로 인한 경기침체는 예고됐던 일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최근 보고서에서 올해 아르헨티나의 경제성장률을 -3.3%로 내다봤다. 고물가와 초강력 긴축, 정치불안 등이 맞물려 올해 아르헨티나는 세계에서 가장 부진한 경제성적을 내는 국가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긴축의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밀레이 대통령도 취임 일성으로 “긴축을 하면 경기침체가 온다. 모두에게 매우 어려운 기간이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다만 경기침체가 해를 넘기진 않을 것이라는 기대 섞인 전망이 지배적이다. 대다수 아르헨티나 현지 경제전문가들은 2025년부터 경기회복이 가시화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필자의 지인 기업인은 “경기침체가 12월에 바닥을 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고 말했다.
OECD는 2025년 아르헨티나의 경제성장률을 2.7%로 예상했다. 내년 아르헨티나 경제가 반등해 예상을 뛰어넘는 깜짝 성장을 기록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JP 모건은 최근 보고서에서 2025년 아르헨티나의 인플레이션을 40%대로, 경제성장률을 5.2%로 예상했다. 중앙은행이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시장조사를 보면 대다수 아르헨티나 경제전문가는 내년 경제성장률을 3~4%, 인플레이션을 60% 안팎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긴축과 극심한 경기침체로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터널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전망이 적중할 것인지 지켜볼 일이다.
※ 위 원고는 현지 외부 전문가가 작성한 원고로, (사)경북PRIDE기업 CEO협회의 공식 의견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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