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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 원정쇼핑 성지에서 미국보다 비싼 나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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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수출지원 해외 서포터즈 / 손영식(아르헨티나) 

 

 

지난해까지 원정쇼핑 성지였던 아르헨티나

 

지난해 4월, 남미에서 큰 화제가 된 동영상이 있었다. 칠레의 한 청년이 장을 보기 위해 국경을 넘어 아르헨티나의 마트를 찾는 '원정쇼핑' 후기를 올린 것이다. 그는 "불과 10만 칠레 페소(당시 약 120달러)로 6개월 동안 먹을 식품을 샀다"며 "칠레에서 이 돈으로는 겨우 2주치 식품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마른국수와 통조림 등 장기간 보관할 수 있는 식품으로 가득 찬 카트와 자동차 트렁크를 보여주며 "벌써 여섯 번째 아르헨티나에 왔는데, 올 때마다 저렴한 물가에 놀란다"고 말했다. 이 동영상은 남미 각국 언론에 소개되며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다.

 

 

 

지난해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국경.

원정쇼핑을 위해 우루과이에서 아르헨티나로 넘어오는 차량이 밀려 있다. 

지난해엔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출처: 일간 코르디제로)

 

 

아르헨티나의 또 다른 이웃나라 우루과이에서도 아르헨티나 원정쇼핑 열풍이 불었다. 지난해 양국 국경을 보면 아르헨티나에서 우루과이로 가는 차로는 텅 비어 있는 반면, 우루과이에서 아르헨티나로 넘어오는 차로는 자동차 행렬이 길게 이어지곤 했다. 우루과이 소비자들을 끌어당긴 것은 극단적으로 저렴한 달러 물가였다. 당시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소비자 물가를 비교해 보면, 청소용품 등 생필품에서 아르헨티나가 최대 280%까지 저렴했다. 우루과이 소비자들은 국경을 넘어 아르헨티나 마트에서 마음껏 쇼핑을 한 후 자동차에 휘발유까지 가득 채워도, 우루과이에서 지출하는 돈보다 훨씬 적은 비용이 들었다.

 

우루과이 소비자들이 아르헨티나로 몰리자 우루과이 국경 도시의 경제는 초토화되었다. 지난해 7월, 아르헨티나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우루과이 북서부의 국경 도시 살토의 실업률은 12.8%로 우루과이 전국 평균인 7.8%의 거의 두 배에 육박했다. 아르헨티나 원정쇼핑이 일상이 되자 고전을 면치 못한 상점들이 줄지어 폐업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아르헨티나 원정쇼핑의 유행으로 2023년 최소 5,000만 달러의 세수 손실이 발생했다고 우루과이 정부는 최근 공식 발표했다. 왕래가 자유로운 남미에서 아르헨티나의 저렴한 달러 물가는 지난해까지 칠레와 우루과이 등 이웃 나라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르헨티나는 그야말로 원정쇼핑의 성지였다.

 

 

확 올라버린 달러 물가

 

오랫동안 아르헨티나에서 수입업에 종사하다가 미국으로 이주한 대만 출신의 지인이 있다. 그는 사업체를 친척에게 맡기고 간 덕에 자주 아르헨티나를 방문한다. 약 보름 전 아르헨티나를 방문한 그는 나를 만나 “아르헨티나의 달러 물가가 왜 이렇게 비싼가? 마트에 갔다가 비싼 달러 물가에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지인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지금의 아르헨티나 달러 물가에 나도 여러 번 놀랐기 때문이다. 지난해까지 남미 원정쇼핑의 성지로 꼽혔던 아르헨티나에서 요즘 국민들이 가장 공감할 사자성어가 '격세지감'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예를 들어, 현재 아르헨티나의 담뱃값은 한국보다 더 비싸다. 남미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20개비 들이 M담배는 3,300페소에 팔리고 있다. 미화로 환산하면 약 3.5달러, 원화로 계산하면 4,800원이 넘는다. 지난해까지 이 담배는 2달러가 채 안 되는 가격에 살 수 있었다. 정부가 금연정책의 일환으로 담배 가격을 대폭 인상한 것도 아닌데, 달러로 환산한 가격이 이렇게 오른 것이다. 헤어스프레이는 4,000페소에 판매되고 있는데, 원화로 환산하면 6,000원에 육박하는 가격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최근에는 인접국으로 원정 쇼핑을 떠나는 아르헨티나 국민이 늘고 있다. 아르헨티나보다 달러 물가가 저렴한 칠레가 새로운 원정쇼핑의 성지로 떠오르고 있다. 아르헨티나를 찾는 칠레 쇼핑객의 발길은 끊긴 반면, 칠레로 원정 쇼핑을 떠나는 아르헨티나 쇼핑객은 꾸준히 늘고 있다는 언론 보도가 자주 나온다. 연휴 때는 칠레로 넘어가는 쇼핑객이 너무 많아 칠레 입국에 10시간이 넘게 걸리기도 한다고 하니, 불과 몇 개월 사이에 상황이 180도 뒤바뀌었다는 것이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생필품을 사기 위해 칠레로 넘어가는 아르헨티나 자동차들이 꼬리를 물고 있다. 

올해 들어 벌어지고 있는 신풍속도다. 

(출처: 이프로페셔널)

 

 

물가 50% 뛸 때 환율은 7% 상승에 그쳐

 

아르헨티나의 달러 물가가 급격히 오르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12월부터이다. 불과 6개월 사이에 아르헨티나는 남미에서 달러 물가가 가장 저렴한 국가에서 가장 비싼 국가 중 하나로 변모했다. 심지어 미국보다 물가가 더 비싸다는 말도 이제는 낯설지 않다. 하버드 출신 경제학자 알베르토 카발로는 최근 “암달러 기준으로 보면 아르헨티나 물가가 미국보다 약간 저렴하지만, 공식 환율로 보면 아르헨티나가 미국보다 더 비싸다”고 밝혔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미국과 아르헨티나의 물가를 비교한 그래프.

푸른색은 암달러, 붉은색은 공식 환율을 기준으로 한다.

(출처: 경제학자 알베르토 카발로)

 

 

아주 당연한 이야기지만, 소비자 물가는 치솟았지만 페소-달러 환율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결과이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1분기 아르헨티나의 소비자 물가는 51.6% 오른 반면, 페소-달러 공식 환율 상승폭은 7%를 밑돌았다. 이 기간 암달러는 1,025페소에서 985페소로 오히려 하락했다. 최근 아르헨티나가 기준금리를 낮추자 정기 예금으로 쏠렸던 돈이 다시 달러로 몰리면서 암달러가 상승세를 타고 있지만, 그 상승폭은 20%대로 여전히 물가 상승률에 크게 뒤진다.

 

필자의 지인은 최근 영국에 사는 친구로부터 들은 말을 전했다. “아르헨티나의 소득은 동남아 수준이면서 물가는 유럽과 같거나 더 비싸다고 하더라.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세계에서 가장 물가가 비싼 도시 중 하나로 꼽히는 런던에 사는 그 친구는 “마트에 가보니 런던보다 30% 이상 비싼 물건이 수두룩하더라”는 말도 덧붙였다고 한다.

 

 

반시장적 규제 풀었는데 오히려 부작용?

 

이 상황에 대해 정부의 책임이 크다는 지적이 있다. 지난해 12월 출범한 하비에르 밀레이 정부는 그간 시행되었던 반시장적 규제를 전면 해제했다. 철저한 시장경제 신봉자인 밀레이 대통령은 “가격을 묶어놓는 식으로는 인플레이션을 잡을 수 없다”며 사실상의 가격 규제(동결)였던 ‘공정한 가격 프로그램’을 폐지했다. 이 프로그램은 생필품의 가격을 정하고 가격 인상률을 정부가 공시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형식적으로는 기업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프로그램이었지만, 실제로는 정부가 기업을 압박해 가격을 묶어두는 것이었다. 반시장적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일정 부분 인플레이션 억제 효과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프로그램이 폐지되자 물가는 급등하기 시작했다. 가격 인상률의 기준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1분기 물가 상승률은 51%였지만, 실제로는 100% 넘게 오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지난해 말 2,000페소였던 초콜릿 세트가 지금은 6,000페소에 팔리고 있다.

 

규제가 사라지자 억눌렸던 가격이 한꺼번에 오르고 있다는 분석도 있지만, 생산 및 유통업계가 기회를 잡아 과도하게 가격을 올리고 있다는 지적도 많다. 필자가 잘 아는 한 유대인 기업인은 “족쇄가 풀리자 기업들이 무분별하게 가격을 올리고 있다”고 말했다.

 

밀레이 정부는 이에 대해 정공법으로 대응할 방침이다. 아르헨티나는 최근 브라질로부터 식빵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이는 식빵을 못 만들어서가 아니라 식빵 가격이 급등하자 공급을 늘려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한 결정이다. 식빵 가격은 지난해 말과 비교해 100% 이상 올랐다.

 

최근 아르헨티나의 소비자 물가는 월간 기준으로 1월 20.7%, 2월 13.2%, 3월 11%, 4월 8.8% 등으로 상승폭이 둔화되고 있다. 특히 4월 한 자릿수 인플레이션은 6개월 만에 처음이다. 반면 1분기에 하락했던 암달러는 다시 상승하여 1,300페소대로 올라설 기회를 엿보고 있다. 이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아르헨티나의 달러 물가는 하락세로 돌아서 인접국과 비슷한 수준이 될 수 있겠지만, 여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적어도 연말까지는 경제력에 맞지 않는 달러 물가를 감당해야 할 것이라고 보는 경제 전문가들이 많다. 인플레이션 둔화와 페소-달러 환율 상승이 얼마나 빠르게 진행될지 지켜봐야 할 것이다.

 

 

 

※ 위 원고는 현지 외부 전문가가 작성한 원고로, (사)경북PRIDE기업 CEO협회의 공식 의견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