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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가난하지만 국민은 달러 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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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수출지원 해외 서포터즈 / 손영식(아르헨티나) 

 

 

기준금리 133%에도 빚 걱정 없는 국민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133%로 끌어올렸다. 8월 97%에서 9월 118%로 기준금리를 올린 지 1개월 만에 또 단행한 두 자릿수 인상이다. 가계부채가 많은 국가라면 전국에서 비명이 들릴 만도 한데 아르헨티나는 조용하다. 대출 상환을 걱정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얘기는 주변에서도 들을 수 없고, 언론에서도 들리지 않는다. 기준금리가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리는 사람들은 정기예금을 가진 예금주들뿐이다. 인플레이션이 살인적이다 보니 아르헨티나에선 30일 만기 단기 정기예금의 인기가 가장 높다. 30일 정기예금을 풍차처럼 돌려 원금과 이자를 다달이 재예치한다면 복리 효과가 나 연 250% 넘는 이자를 챙길 수 있다. 물가상승률과 페소-달러 환율 동향 등을 면밀히 따져 정기예금을 넣으면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원금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제법 짭짤한 이자소득을 올릴 수 있다. 

 

반면 대출 상환을 걱정하는 사람이 없다는 건 빚을 진 사람이 적다는 뜻이다. 특히 주택담보대출로 잔뜩 빚을 진 사람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처럼 아르헨티나에선 정말 만나보기 힘들다. 중앙은행의 통계를 보면 상반기 기준으로 민간 대출에서 주택담보대출의 비중은 4.4%에 불과했다. 은행에서 돈을 빌려 주택을 장만하는 게 한창 유행이던 2000년대 초반에도 이 비중은 33%를 약간 웃돌았을 뿐이다. 빚을 내 부동산을 매입하는 게 흔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적어도 우리나라와는 확연히 다른 풍속도다. 

 

 

현찰 동원력 풍부한 국민?

 

그렇다면 부동산처럼 거래액이 클 때 자금은 어떻게 마련하고 어떻게 지불하는 것일까. 거짓말 같지만 보유한 현찰로 매매대금을 일시금으로 내는 게 원칙이다. 20만 달러(한화 약 3억 원) 이하의 소형 아파트에서 100만 달러(한화 약 13억 원)를 웃도는 최고급 아파트에 이르기까지 마찬가지다. 

 

35만 달러(한화 약 5억 원)짜리 아파트를 구매한 교민이 있다. 부동산 명의이전엔 공증인 개입이 필수여서 매매는 공증인사무실에서 진행되는 경우가 왕왕 있다. 교민은 35만 달러를 전액 미화 현찰로 지불했다. 공증인 측은 교민이 건넨 미화 지폐를 복사해 사본에 일일이 사인을 받았다. 혹시라도 위폐가 섞여 있다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였다. 

 

필자가 아는 현지인 대학교수는 최근에 소형 아파트를 구입했다. 자녀들이 모두 출가하고 자신도 은퇴해 집을 줄인 것인데 그 또한 매매대금을 전액 미화 현찰로 지급했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경제적 여력에 눈높이를 맞추는 문화 덕분이다. 가진 현찰이 10만 달러(한화 약 1억 원)라면 중개 수수료와 명의 이전 비용 등을 모두 합쳐 10만 달러를 한도로 잡고 부동산을 알아보는 게 아르헨티나에선 상식이다. 빚을 내 20~30만 달러(한화 약 3억~4억 원)인 집을 살 생각은 애당초 하지 않는다. 물론 1~2만 달러가 부족해 형제 등 가족이나 친인척에게 돈을 빌리는 경우는 종종 있다. 필자가 말하는 건 집값의 60~70%에 달하는 은행 빚이다.

 

사업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기업은 사정이 다르지만 소기업이나 개인은 사업의 규모를 자신이 보유한 현찰에 맞추는 게 보통이다. 자영업자가 은행 대출을 받아 사업을 시작했다거나 경영상 어려움에 봉착해 은행 빚을 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은행에서 빚을 내는 사람이 적다 보니 대출 금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적을 수밖에 없다. 기준금리가 세 자릿수를 기록 중이지만 대출 상환을 걱정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아르헨티나의 매트리스 예금

 

일본에는 ‘단스(タンス, 장롱) 예금’이라는 게 있다고 한다. 은행 같은 금융회사에 맡기지 않고 안방 옷장이나 개인 금고에 보관하는 현금을 일컫는 표현이다. 일본에 단스 예금이 있다면 아르헨티나에는 매트리스 예금이 있다. 말 그대로 개인이 안방 매트리스 밑에 깔아놓은 현금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드러내기 싫어서 현금을 이렇게 보관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이 표현이 현찰 예금의 대명사처럼 사용되면서 아르헨티나뿐 아니라 스페인에서도 진짜로 비밀금고가 설치된 매트리스가 출시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시장에 출시된 매트리스 금고. 매트리스에 비밀금고가 설치된 제품이다. 

(출처: Novate.RU)

 

 

물론 이제 매트리스 밑에 달러를 깔아놓은 사람은 예전보다 줄었지만, 보관 방식이 변한 것일 뿐 개인이 현찰을 품고 있는 문화가 달라진 건 아니다. 그래서 아르헨티나에선 거액의 피해가 발생했다는 가정집 절도나 강도 사건이 언론에 비교적 자주 보도된다. 언젠가 지방에선 70대 독거노인이 저금통으로 개조한 소화기에 미화 40만 달러를 보관하고 있다가 이를 눈치챈 가사도우미에게 털린 사건이 발생했다. 최근엔 미화 70만 달러를 봉투와 비닐에 넣어 복대처럼 몸에 칭칭 감고 이동하던 한 중국인이 경찰에 붙잡힌 사건도 있었다. 

 

 

  

한 중국인이 온몸에 달러를 감고 이동하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출처: 인포바에)

 

 

거액의 현금을 개인이 보관하는 문화가 워낙 뿌리 깊다 보니 아르헨티나에선 ‘국가는 가난하지만 국민은 부자’라는 말이 농담으로만 들리진 않는다. 실제로 아르헨티나 국민은 달러를 잔뜩 움켜쥐고 있다. 미 연방준비제도(Fed, 연준)의 2020년 보고서를 인용한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의 발표를 보면 미국 본토 밖에서 통용되는 달러 지폐의 20%는 아르헨티나 국민이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중앙은행은 국민이 보유한 미화를 최소한 2,000억 달러(한화 약 271조 원)로 추산했다. 

 

일본에서 단스 예금은 가계의 금융자산 동향을 파악할 때 중심 지표 역할을 한다고 한다. 아르헨티나도 다르지 않다. 통계청(INDEC)이 정기적으로 발표하는 매트리스 예금 통계는 아르헨티나의 가계 형편을 짐작할 때 반드시 참고해야 할 지표다. 통계청에 따르면 2분기 현재 아르헨티나 국민이 보유한 매트리스 예금은 2,649억 4,800만 달러(한화 약 360조 원)로 추정됐다. 

 

매트리스 예금이라고 부르지만, 통계청이 내놓는 추정치는 아르헨티나 금융권에서 이탈한 달러 자산을 종합적으로 통칭하는 표현이다. 해외로 몰래 반출해 미국이나 우루과이 등 외국 은행에 예치한 달러 현금, 개인이 집이나 대여금고 등에 보관하고 있는 달러 현금 등이 모두 포함된다. 

 

 

페소화는 써버리고 달러는 저축한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지지율 선두를 달리고 있는 극우파 하비에르 헤라르도 밀레이(Javier Gerardo Milei) 후보(자유전진연합)는 최근 페소화를 배설물에 비유했다. ‘페소화는 ×같은 화폐’라는 발언은 논란을 빚어 주요 외신에도 보도됐지만 어쩌면 페소화를 보는 국민의 심정을 가장 정확하게 대변한 것인지 모른다. 

 

아르헨티나에서 페소화는 기능이 제한적인 화폐다. 일상생활에서 물건을 사고팔 때 사용하는 돈일 뿐 결코 저축 수단은 아니다. 아르헨티나 국민에게 저축 수단은 오직 달러뿐이다. 매트리스 예금이 해마다 불어나는 이유다. 다소 과거에 발표된 내용이지만 저축 수단으로서 달러의 인기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비교 수치가 있다. 연준이 2006년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아르헨티나 국민이 다양한 형태로 보유한 미화는 최소한 500억 달러(한화 약 68조 원)였다. 멕시코나 페루(각각 50억 달러, 한화 약 6조 8,000억 원)보다 훨씬 많았고, 브라질(10억 달러, 한화 약 1조 원)이나 칠레(2억 5,000만 달러, 한화 약 3,400억 원)보다는 압도적으로 많았다. 

 

 

 

한 남자가 환전소에서 바꾼 달러를 세어 보고 있다. 

(출처: 라나시온)

 

 

부동산이 100% 달러로 거래되는 것도 이런 문화에서 기인했다고 한다. 부동산 역시 미화처럼 가치 보전의 수단으로 여겨지면서 페소화가 아닌 달러로 거래되기 시작했다는 게 정설이다. 

 

아르헨티나 국민은 필사적으로 달러를 모아왔다. 하지만 소비를 위해선 달러 예금에 손을 대는 데 크게 고민하거나 주저하지 않는다. 필자가 잘 아는 한 치과의사는 요즘 달러로 치료비를 내는 환자가 부쩍 늘었다고 말했다. 이 의사는 비용적인 면에서 아르헨티나 탑(TOP) 5%에 드는 의사로 한국보다 더 비싸게 받는 치료 항목도 많다. 환자들은 “페소화는 그때그때 써버려 생활비 정도만 남았다”며 달러를 내민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언론을 보면 “아르헨티나는 거지 국가가 됐다”는 취지의 보도가 부쩍 많아졌다. 틀린 말이 아니다.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아르헨티나 경제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국가는 거지가 됐지만 국민은 아직 상당한 돈, 특히 달러를 손에 쥐고 있는 것 같다. 은행의 대여금고가 수요에 비해 턱없이 부족해 대여금고만 빌려주는 기업까지 등장했으니 말이다. 

 

 

 

※ 위 원고는 현지 외부 전문가가 작성한 원고로, (사)경북PRIDE기업 CEO협회의 공식 의견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