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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레 100% 국가에서 국민이 살아남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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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수출지원 해외 서포터즈 / 손영식(아르헨티나) 

 

직접 체험한 리디노미네이션


아르헨티나에 간 것은 1984년이었다. 벌써 40년 전이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은 당시 아르헨티나의 50페소 권과 50만 페소 권 두 가지 지폐다. 어린 나는 50페소 권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군것질거리를 사먹곤 했다. 

 

50페소 권 지폐는 50만 페소 권과 색깔과 도안이 비슷했다. 페소화의 도안과 색깔은 액면가에 따라 각각 달랐지만, 그 둘은 비슷했었다. 당시에 이해할 수 없었던 건, 그 두 화폐는 수치상으로 만 배 차이가 났지만, 그 가치는 거의 같았다.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겪었던 아르헨티나가 리디노미네이션(한 나라에서 통용되는 통화의 액면을 동일한 비율의 낮은 숫자로 변경하는 것)이라는 걸 단행했단 사실을 알게 된 건 한참 뒤였다. 

 

어렸을 땐 미처 인식하지 못했지만 당시 아르헨티나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았다. 예컨대, 택시를 타면 미터기 숫자만 올라가고, 요금은 표시되지 않았다. 이내 목적지에 도착하면 택시기사가 미터기에 찍힌 최종 숫자를 확인하고 긴 요금표를 본 후 요금이 얼마 나왔는지 알려줬다. 상점도 마찬가지였다. 상품에 상품가격을 표시한 가게를 보기 힘들었다. 가게에 들어가 물건 값을 물어도 가격을 바로 알려주지 못했다. 한참 계산기를 두드린 후에야 가격을 알려주곤 했다. 모두 인플레이션 때문에 벌어졌던 일들이다. 

아르헨티나의 인플레이션은 1984년 626.7%, 1985년 672.2%를 기록하다가 1987년엔 3,079%이란 살인적인 수치를 기록했다.

 

 

마법 같았던 페그제


끝을 알 수 없는 인플레이션을 잡은 건 달러 덕분이었다. 달러는 마치 마법을 부리듯 인플레이션을 단번에 해결했다. 그 주인공은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이다.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은 1991년 화폐개혁과 함께 ‘페소-달러 페그제’를 도입했다. ‘1페소를 1달러로 교환할 수 있고, 중앙은행이 환전을 보증한다’는 게 페그제의 핵심이었다. 화폐가치 하락이 일상이던 아르헨티나 국민은 페그제를 열렬히 환영했다. 그리고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1990년 1343.9%를 기록한 인플레이션은 1991년 7.7%로 뚝 떨어졌다. 인플레이션은 점점 낮아져 1994년엔 0.5%까지 내려갔다. 지금 되돌아봐도 기적 같은 일이다. 

 

 

 


 <1990년대 1대1 페소 (달러 페그제의 주역인 하버드 출신 도밍고 카발로 당시 경제장관이 1페소권과 1달러권을 들어 보이고 있다.)> (출처=테에네)

 

 

 

 

그러나 기적은 오래가지 않았다. 페그제를 도입한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은 개헌을 통해 아르헨티나 최초의 연임 대통령이 됐지만, 이후 여당인 페론당은 정권을 지키지 못했다. 인플레이션이 해소됐다고 느낀 아르헨티나 국민은 정치개혁을 원했고, 청렴하고 정직한 이미지로 대중적 인기를 누리던 야당 대통령후보를 당선시켰다.

 

선거운동이 한창이던 1999년 12월 야당 후보는 ‘정권이 바뀌면 페그제가 무너질 수 있다’는 일각의 우려에 대해 “나와 함께라면 1페소는 계속 1달러가 될 것”이라고 굳게 공약했다. 하지만 집권 2년 만에 외환위기가 터졌고,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아르헨티나엔 다시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찾아왔다. 2002년 1월, 아르헨티나는 페그제를 폐지했다. 

 

 

 

 

<아르헨티나 중앙은행> (출처=블룸버그)




물가와 ‘맞짱’ 뜨는 임금


장황한 이야기를 널어놓은 건, ‘아르헨티나=인플레이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 관련 한국의 뉴스를 봐도 “소비자물가상승률이 100%를 넘어섰다”, “국민의 40%가 빈곤에 빠졌다” 등의 어두운 소식만 들린다. 언론 보도는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적어도 통계수치상 오류는 없다. 

아르헨티나 국민은 어떻게 이런 살인적 인플레이션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아니, 견디고 있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명목 소득이 함께 오르고 있는 덕분이다. 아르헨티나에서 임금 100% 인상은 흔한 일이 됐다. 임금단체협약은 노사가 1년 단위로 체결하는 게 보통이지만 최근엔 3~6개월로 짧아졌다. 게다가 협약이 만료되기 전 인플레이션이 임금인상률을 앞지르면 즉각 재협상을 한다는 특약을 포함하는 경우도 많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물가가 아무리 올라도 노동자의 실질소득이 급감하진 않는다. 물론 갈수록 지갑이 터질 듯이 두툼해지는 불편은 감수해야 한다.

소비자물가와 소득의 관계를 따져볼 수 있는 마지막 자료는 아르헨티나 통계청이 발표한 3월 통계다. 3월 소비자물가는 전달 대비 7.7%, 지난해 같은 달보다 104.3% 올랐다. 같은 달 안정적 직업을 가진 공식 취업자의 평균 소득은 23만 5,523페소로 1년 전 11만 8,814페소보다 98.2% 늘었다. 물가에 비해 살짝 뒤지긴 했지만 임금과 거의 대등한 레이스를 펼친 셈이다. 네우켄(132.4%), 살타(114.4%), 추붓(112%) 등 주(州)별로 보면 임금이 소비자물가보다 더 빠르게 오른 곳도 많았다. 연방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임금은 103.2% 상승으로 나름 선방했다. 

올해 초 경제부는 인플레이션을 월 3%로 낮추겠다며 단체협약 임금인상률을 연 70% 이하로 묶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막강한 정치 파워를 가진 노동계가 정부의 뜻을 따라줄 것이라고 기대했다면 오산이다. 기업은 정부의 압박에 백기투항하는 경우가 많지만, 파업과 시위라는 강력한 무기로 무장한 노동계는 코웃음을 친다.

아르헨티나의 최저임금은 연 1회 노사정위원회에서 투표로 인상하는 게 관례였다. 그러나 이제는 최저임금도 수시로 오른다. 올해 1월 6만9500 페소였던 최저임금은 4월 8만342 페소, 5월 8만4512 페소, 6월 8만7987 페소로 2분기에만 26.6%가 올랐다. 이달 15일에도 추가 인상을 위한 노사정위원회가 열린다. 최저임금은 줄기차게 오르지만, 노동계는 최저임금 인상률이 결정될 때마다 “부끄러운 수준”이라며 불만을 토로한다.



 

 

퍼주기 지원해온 중앙은행


아르헨티나의 인플레이션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아르헨티나의 독립혁명에 불이 붙은 1810년부터 지금까지 213년간 물가통계를 보면, 인플레이션은 해마다 평균 51%였다는 조사결과가 최근 나왔다. 소비자물가가 그야말로 미친 듯 뛰었던 하이퍼인플레이션 시기를 제외하더라도 연 평균 인플레이션은 9%였다. 이런 역사를 볼 때, 아르헨티나 국민에게 인플레이션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질 법도 하다.

인플레이션의 근본적인 원인은 ‘퍼주기’에 있다. 지금은 바뀌었지만 한때 아르헨티나 전기요금고지서는 ‘국제판’으로 발행된 적이 있다. 전기요금고지서에는 사용량, 요금, 세금 등이 표시되는 게 보통인데, 당시 고지서에는 ‘귀하가 ○○○에 산다면’이라는 항목이 있었다. 예컨대 ‘이번 달 당신이 낼 요금은 국가가 보조금을 지원한 덕분에 100페소지만, 브라질에 살고 있다면 150페소를 냈을 것이다’, ‘칠레 국민이라면 170페소를 냈을 것이다’라는 식으로 ‘친절하게’ 알려주곤 했다. 물론 ‘이번 달에 국가가 귀하에게 지원한 보조금은 ×××페소였다’고 생색을 내는 건 기본이었다. 아르헨티나의 퍼주기가 얼마나 만연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아르헨티나의 전기요금 고지서 (국가가 보조금을 지급한다는 글이 크게 적혀 있다) 출처=티엠포>

 

 

 

 

막대한 퍼주기를 고집하다보니 국가재정은 늘 적자다. 1~4월 국내총생산(GDP)에 대한 아르헨티나 재정적자 비율은 0.69%를 기록했다. 아르헨티나는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지원받으면서 올해 재정적자를 GDP의 1.9%로 줄이겠다고 약속했지만 이행은 이미 불가능해졌다는 관측이 나온다. 무엇보다 독립성과 자율성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 중앙은행이 문제다. 중앙은행은 발권력을 동원해 적자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정부의 퍼주기를 지원해왔다. 아찔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한 원흉은 중앙은행인 셈이다. 

 

 

 

 

※ 위 원고는 현지 외부 전문가가 작성한 원고로, (사)경북PRIDE기업 CEO협회의 공식 의견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